P.114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해 일어난 사람들
그들을 끝까지 움직이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을 마주 보게 한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P.116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지금도 인간의 내면에서는 빛과 어둠이 갈등하고 있다.
어느 때는 빛이 어느 때는 어둠이 승리하지만, 그 작은 감정의 파동은 우리가 사는 인생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파동이 공명하여 거대한 파동을 이루었을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공동의 의지인지도 구별하지 못한 채 거대한 힘에 이끌려 가기도 한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길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선인가?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P.119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 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누군가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
여태까지 숨 쉬고 살아왔던 길을 지워버리는 것.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목적이 돼버리는 것.
과거를 지움으로써 미래를 없애버리는 것.
학살자들은 그렇게 그들이 의지를 꺾어버렸다.
P.161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악몽보다 더 악몽 같은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감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인생이다.
과거에 묶여 미래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슬픔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어설픈 위로의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찌르는 고통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의 고통을 누가 알 수 있을까?
P.173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 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태극기를 두르고 애국가를 부른 것은 부정되지 않으려는 약자들의 몸부림이었다.
인간이기를 원한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고 외친 것이다.
나를 조준하고 있는 당신도 말이다.
P.184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모두를 잃을까 두려워한 선택은 어머니의 심장에 평생의 상처를 남겼다.
한해 한 해가 지나고 죽음의 때가 다가올 때까지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선택을 강요했는가?
왜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그녀가 감당해야만 하는가?
거대한 힘에 눌린 상처는 지금도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에.
P.207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5.18은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일이기도 하다.
울산에서는 삶의 힘겨움에 결국 사방 1미터 남짓한 공간에 자신의 몸을 가두고 온몸으로 살겠다는 몸무림을 보여준 이가 있다.
누구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아니 지켜주지 않았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사회의 존재 이유가 사람의 존재 이유가 의심되는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세상을 향해 소리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군가는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이 극단의 온도차는 무엇 때문일까?
능력의 차이인가?
마음가짐의 차이인가?
거리의 차이인가?
차이는 없앨 수 없다.
우리는 그 차이로 인해 진보하고 있고 인간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다.
유전자가 시켰든 정신이 시켰든 말이다.
그 벌어진 간극을 1cm 좁히는 데 드는 목숨의 대가는 얼마나 될까?
수 십 명? 수 백 명? 수백만 명?
기술이 진보하고 전 세계는 세계화라는 사슬로 묶여가고 있지만, 우리를 연결해주는 유대의 끈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스마트폰 속에 두 눈을 가두고 헤드셋으로 귀를 막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들로 가득 찬 세상
사회의 부가 증가할수록 마음의 빈자가 늘어가는 세상
스스로 만든 진보의 벽에 갇힌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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