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자들의 이야기
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한때는 전설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역사로 알려진 이 서사시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다.
트로이 전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반목하게 된다.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이었던 왕비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뺏았자 아킬레우스는 참전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일리아스는 이 반목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분쟁의 씨앗이었던 노예 브리세이스가 주인공이 이야기이다.
왕비였지만 아킬레우스에 의해 그녀의 나라는 멸망당했고 모든 사내들은 죽음을 당하고 여인들은 노예가 되었다.
P.278
패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과 더불어 죽는다.
일리아스에서 그녀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 1의 수준에 불과하다.
역사가 집중하는 이들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고 수많은 엑스트라들은 그저 잊힌 존재가 될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그녀를 역사 속 주인공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P.74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매달려봤자 얻을 게 없었지만, 여전히 나는 매달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세계에서, 내게는 아직 어떤 역할이 있었고, 어떠한 존재였으니까.
그걸 놓아준다면 나 자신의 마지막 흔적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인간이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런 것일까?
거대한 인류사는 한 인간에게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벽과 같을 것이다.
너무 거대해서 평평한 것처럼 느껴지는 둥근 지구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거대한 역사가 아닌 개인의 역사에 집중한다.
아주 좁은 세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던 브리세이스의 공간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다른 여성 노예들과의 사건을 통해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만의 공간 안에서 펼쳐진다.
우리가 사는 공간 역시 그녀의 공간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역시 브리세이스처럼 작은 공간 안에서 기억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든 우리가 남기는 발자취는 우리에게 사는 이유와 살아갈 목적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
패자이자 약자인 브리세이스를 지배자인 남성과 대비된 약한 여성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본 그녀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브리세이스의 모습.
다른 점이 있을까?
P.55
자유인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노예는 물건처럼 취급되는 사람이 아니다.
노예는 물건이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여기듯, 노예 스스로도 자신을 물건으로 취급한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에서 각 계급에 속한 인간은 그 계급을 넘어선다는 생각은 갖지 못한다.
약물과 세뇌를 통해 제한된 그들의 의식 속에는 계급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맡은 소명이 존재할 뿐이다.
제한된 사고는 제한된 시야만을 갖게 만들 뿐이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노예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상적이고 늘 사용하는 '자유'라는 것을 나는 누리고 있는 것일까?
P.397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의 노래와 이야기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트로이 최후의 사내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나도, 트로이인 어머니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그 자식들이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끔찍한 악몽이더라도.
아킬레우스 이야기에서 행인 1이었던 브리세이스가 자신의 서사를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행인 1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부터 그 서사는 시작될 것이다.
브리세이스도 자신의 서사를 그렇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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