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영웅의 격돌은 치열했다.
한 영웅은 독보적인 무력을 앞세워 적을 물리쳤고, 다른 영웅은 사람을 앞세워 융합하였다.
저자의 시각에서 초한쟁패의 승리는 이런 차이점이 결정지었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유방을 협의 정치를 이어받은 이로도 묘사하고 있다.
협의 정치란 무엇인가?
유방은 협의 정치를 이어받아 사람들을 융합시켰으며, 나아가 진나라와 달리 장수하는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진나라의 강압적인 통치를 눈앞에서 바라보고 그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항우와 유방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결과는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자 전국시대를 끝낸 진정한 인물로서 저자가 유방을 꼽는 이유는 아마도 시대적인 변곡점은 한의 건국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그 통치방법은 전국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유방의 한을 성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통일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이념이 싹틀 수 있었다.
이 시리즈는 역사적인 객관적 서술보다는 저자의 해석이 많이 가미된 역사서이다.
읽는 이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만 열거했다면 11권이라는 분량을 읽는 것은 그저 지옥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저자는 중국 현지를 수없이 탐문하였고 그 흔적을 각권의 말미에 기행문의 형식을 빌어 짤막하게 남겨놓았다.
그의 방대한 한자 지식과 실행력에 존경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역사 초보로서 이 책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처음 접하기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해석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는 책이고 오히려 그런 해석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사실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어쩌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학자로서가 아니라 교양서적으로 접하는 사람에게는 재미가 우선이지 않을까?
게다가 저자가 역사적인 사료를 해석하는 방법과 진위를 판단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것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는 대략 4천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읽기에 충분히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기반으로 좀 더 깊은 역사서에 접근할 수 있는 초석으로서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중국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와 떼려야 뗄 수도 없고 고대 사료가 거의 소실된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많은 전문가들이 패권국으로서의 미국의 지배가 끝나가는 시대라고 얘기하고 있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미국은 스스로의 입김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의 나라가 독주하는 시대가 저물면 열국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해답을 비춰주는 등불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국시대의 한나라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오기가 이끌던 위나라나 무령왕이 통치하던 조나라의 시대를 따를 것인가?
어쩌면 주변 강국에 끼여 숨쉬기 힘들었던 정나라를 굳건히 지킨 자산이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줄지도 모른다.
P.14
사회학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본다면 관중이든 유방이든 옛 왕조시대의 지도자들은 본질적으로 착취자들이다.
국가 권력을 차지한 자들이 언제인들 공평무사했으랴.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이들은 무결한 성인들이 아니라, 사리를 취하면서도 가끔 공익을 생각했던 사람들, 바로 차선의 인물들이었다.
관중과 유방은 당시 역사가 만들어낸 차선이었다.
우리가 평가해야 할 지점은 '한의 정치가 진과 질적으로 달랐는가, 유방이 기존의 제왕들과 얼마나 달랐는가'일 뿐 그 이상은 모두 윤리학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시대의 한계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성인의 시대는 오제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 이후로는 오직 영웅의 시대였으며, 영웅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완전무결한 통치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현대국가에서 수없이 많이 법안이 쏟아지지만 수없이 많은 구멍이 생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와 지금이 다르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영웅이 해답을 제시했지만, 이 시대에는 시스템이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시대에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유연성을 가진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특출 나게 존경받는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P.17
정치 행위로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이 결국 법정으로 가지만 사실 법정이 정치적 판단의 꼭대기에 있음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지도 않고 판결은 늘 정치적이다.
P.47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간신이란 다른 이가 아니다.
식물의 물관과 체관을 막는 좀벌레나 동물의 혈관을 막는 암이나 기름 덩이처럼 상하 간의 말을 통하지 못하게 하는 자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자의 찰떡궁합이라니......
P.48
진나라 치하 가장 바닥에서 학대당하던 이들이 역시 학대를 참다못해 일어난 산동의 인민들과 대치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이이제이를 국내 규모에서 응용해 이민제민의 책략을 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면령은 이른바 신의 한 수였다.
사실상 노예 상태의 굴레를 벗어나 신분 상승까지 노리던 한 형도들의 사기는 과연 진나라 지배층의 기대를 만족시켰다.
어째서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편에 서는가?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데다 편한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쉽고 편한 길을 택한다.
앞서려는 사람은 없고 자기 주변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기득권이 개돼지를 기르는 방식은 이렇게 쉽다.
P.233
동성까지 추격하며 한은 무려 초나라 병사 8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사마가 항복하는 상황에서도 남은 이들, 분명 초 땅에서 가장 영용한 이들이자 배신을 모르던 이들이었다.
전쟁이란 이렇게 가장 용감한 이를 몰살시키는 행위니, 어떻게 인류가 전쟁을 통해 진화했다고 단정할 수 있으랴.
가장 용감하고 가장 앞장서는 사람은 가장 먼저 죽는다.
독립군의 자손보다 친일파의 자손이 더 잘 사는 이유는 친일파의 생존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그렇게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가장 용감한 자의 수명은 짧아지고 가장 비겁한 자의 수명은 길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은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이 시대에 영웅이 없는 이유는 이런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P.275
혹독한 세상의 관리들은 법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먹고살았다.
지금이 그렇다.
미디어는 악재를 먹고살고, 정치인은 비방을 먹고살며, 경제인은 착취를 해서 먹고 산다.
우리는 경쟁자를 물리쳐야 먹고 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331
사실 관리들에게 강한 법을 적용하고 용서하지 않는 조항은 잘 지키기만 하면 백성을 지키고 범죄를 줄이는 첩경이다.
관리들에게는 법을 구부리지 않고 강하게 집행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우는 인자한 성군이라 칭찬받는 문제가 관리들에게 더 엄격했다고 주장한다.
관리의 권력남용을 강하게 규제하는 면은 진법의 선진적인 부분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다.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 옛날 사람도 알고 실천하려 한 것이 지금까지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권력이 강할수록 책임은 적어지는 것일까?
인간의 종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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