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했지만, 그 수명은 길지 않았다.
승리를 쟁취한 이후가 더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진나라를 통해 알 수 있다.
저자는 전국시대를 끝낸 진정한 주인공을 한의 유비로 보고 있다.
20년이 채 걸리지 않아 진시황은 6국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는 정복군주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대한 국가를 운영하는 군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서 진의 통일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P.13
인류 역시 동물의 한 종이다.
'생존'이 인간의 1차 본성이라면 '자유'는 인간의 2차 본성이다.
사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은 이 생존과 자유라는 인간의 본성과 뒤얽혀 있다.
통일을 주장하는 통치자들은 반드시 인민의 생존을 이야기하고, 전복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이야기한다.
P.15
통치자를 태우고 굴러가는 두 바퀴는 자고로 스스로의 힘과 인민의 동의, 즉 경성권력과 연성권력이다.
권력자에게는 힘이 있어야 하며, 그 권력의 방향은 민중을 향해야 한다.
위임한 자와 위임받은 자가 어우러질 때 선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권력은 아래가 아닌 위로 향한다.
그리고 위임한 자는 배신당한다.
훌륭한 군주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중간만 가줘도 민중은 그저 다행으로 생각할 뿐이다.
P.80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기에 능히 그렇게 커질 수 있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으며 왕자는 여러 무리를 물리치지 않기에 그 덕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이사가 한 말이라 하며, 아주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진은 자국 출신이든 타국 출신이든 지위고하나 빈부를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라면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이는 것만큼 자신의 그릇이 작음을 보여주는 행동이 또 있을까?
P.89
기원전 231년 중국 사상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가 호적에 올랐다.
실로 제도사적으로도 대단한 성취였다.
그러나 향후 동아시아 남성들이 이 조치의 희생양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더는 자유인이 아니다.
당시 관부에 두는 호적에서 개인이 차는 호패를 거쳐 오늘날 지갑에 들어가는 주민등록증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끊임없이 국가가 감시의 강도를 높여가며 관철한 것이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개인정보를 어디까지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던 적이 있다.
현대는 개인은 권력의 감시를 피하기 힘들다.
민중 스스로 자신의 속박을 강화시켜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보를 위해 속박을 감내하였다.
빈곤한 자유와 풍요로운 속박 사이 그 어디쯤 우리는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을까?
P.149
형가를 통해 태사공이 말하고자 한 바는 아직도 유효하다.
'모든 인간은 국민 이전에 자연인이다.'
P.176
수성전에서 귀한 집안의 자제에게 오히려 어려운 임무를 맡기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먼저 그들이 잃을 것이 더 많았기에 좀 더 책임감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귀족의 도덕률이었다.
평화 시에 더 누린 사람은 위기 시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과연 그러한가?
위기는 오히려 그들에게 기회가 아니던가?
P.321
평화 시에는 상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 다스리는 것이다.
상하의 법이 모두 정의의 정신에 근접할 때 백성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할 희망을 품는다.
아랫사람만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도 자신의 잘못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을 모르는 군주는 없는 것이 낫다.
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지만 실제로 그런가?
어느 누구도 이상일뿐 실제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것을 의미 없다 할 것인가?
이상이 없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길잡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속박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보를 가져왔고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P.332
진이 이렇게 된 것은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키고 이를 견제할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제할 장치가 없으면 진시황과 같은 카리스마적 통치자는 권력을 남용할 것이고 호해와 같은 어리석은 통치자들은 조고 따위의 이인자가 욕망을 실현하는 숙주로 전락한다.
견제 장치란 중국이 이미 천 년간 갈고닦은 언로다.
듣기는 늘 어렵다.
편견을 머릿속에 가득 담고 살아가는 인간이 그것을 덜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평범한 이는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그가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지도자라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독재라는 말이 우리를 항상 두렵게 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아무리 잘하는 독재라도 결국은 썩고 만다.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자신의 치적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은 황제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다.
삼황과 오제를 넘어 신이 되었다 생각하는 시황제
진은 피를 밟고 통일하였고, 그 피에 대한 사죄는 전혀 없었다.
진이 무너뜨린 적은 불의의 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준에서는 옳은 일을 택했던 적이었다.
포용할 줄 모르는 지도자가 가진 한계를 우리는 진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진은 다시 갈갈이 찢어지고 만다.
진의 통일은 그저 봉합이었을 뿐 모두를 어우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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