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켑틱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회의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잡지이다.
P.221
오늘날 많은 사람이 회의주의를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나는 '회의주의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주의자는 특정 신념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를 대하는 사람은 짜증이 날 수 있다.
왜냐하면 끝없이 의문을 갖고 근거와 이유를 찾는 자세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 둥글게 즐겁게 살지 왜 저러나 싶을 수도 있고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낙관주의는 정신승리일 뿐이다.
시중에는 수없이 많이 긍정의 힘을 설파하는 미디어가 넘쳐난다.
하지만, 실천 없는 긍정이란 어울 좋은 기대일 뿐이다.
낙관주의에는 반드시 행동이 필요하다.
사회가 발전하는 데는 긍정의 힘도 필요하지만 부정의 힘도 필요하다.
의문이 없는 곳에 진보가 있을까?
불공평에 대해, 부조리에 대해 혹은 거시 세계에 대해, 미시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답을 찾으려고 할 때 진보는 시작된다.
P.141
시간은 우리가 관찰하는 사건들을 측정하고 조정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도구이긴 하지만, 시간이 진정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는 과연 시간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계는 시간을 정의할 수 없다.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늘어날 수 도 줄어들 수 도 있음을 증명하였다.
엿가락 같은 시간을 우리는 상상하지 못하지만, 평생을 뛰어다니면 평생을 걸어 다닌 사람보다 단 몇 초라도 덜 늙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창간호의 주제인 시간여행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형된다.
시간여행을 논하려면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당연할 테니 말이다.
과연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흐르는 것일까?
P.171
우리 우주가 우리에게 맞춰 미세 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우주에 맞춰서 미세 조정된 것이다.
인간은 늘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우주의 속에서 티끌만큼의 크기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인 인간은 자신을 우주보다 더 위대하고 크게 생각한다.
그 편견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법칙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을 자꾸 중심에서 변방으로 몰아냈다.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는 태양계의 한 행성이 되었고, 그 태양계는 은하의 한구석에 존재하는 천체였으며, 은하마저도 우주에는 널리고 널린 것이었다.
우리의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는 중심에서 자꾸 멀어진다.
중심이 아니면 어떠한가?
변화는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인간은 변두리에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보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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