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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Food?

뉴필로소퍼 VOL 1 - 너무 많은 접속의 시대 - 바다출판사

by soulsight 2022. 3. 28.

 

생활 철학 매거진

뉴필로소퍼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한다.

 

창간호에서 다루는 큰 주제는 소통이다.

 

P.33

침묵은 재잘거림이 잦아든 뒤에 남는 무엇이 아니다.

쓰고 남은 자투리도, 공백기도 아니다.

그보다는 밤을 뒤덮는 어두움이 그렇듯 풍성함과 심오함, 신비로움과 공명으로 가는 길이다.

프렌시스 베이컨이 말했듯 "침묵은 지혜를 살찌우는 잠이다."

 

P.34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에서 언어의 한계를 도발적으로 표현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그가 이 문장을 언어가 끝나는 경계선 너머에서 의미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뜻으로 썼다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언어 철학자에게 기대하기에는 너무 큰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로도 유명하다.

"내가 쓰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다."

문장을 뒤집어도 눈부신 통찰이다.

 

너무 많은 정보와 소통이 잡음이 되어버린 시대.

오히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대.

침묵은 수용을 뜻한다.

 

수많은 색깔인 섞여있는 사회에서 자신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너도나도 소통의 데시벨을 높인다.

한 명 두 명에서 시작된 소음은 이내 전체로 퍼져나가 평균 데시벨을 높이고 더 높은 데시벨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 한다.

악순환은 이렇게 이어진다.

 

침묵은 볼 수 있게 해 주고, 들을 수 있게 해 주며 얕은 것이 아니라 깊은 것이다.

 

 

P.43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세계화된 세상에 사는 우리는 지금껏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타인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손택이 표현한 대로, 동정심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저들의 고통이 새겨진 그 지도에서 우리의 특권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여러모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특권이 저들의 고통과 관련 있지는 않은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누군가가 누리는 풍요가 다른 이가 겪는 궁핍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초연결,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가 만든 나비의 날갯짓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태풍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

내 주변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동정심은 옅어지지만 그걸 핑계로 면죄부를 요구해선 안된다.

누군가가 누리는 풍요가 다른 이가 겪는 궁핍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

개인의 인지의 한계를 넘어섰을 뿐 우리는 이미 모두 연결되어 있다.

 

 

P.48

혐오는 흘깃 보는 데서 생겨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을 보자마자 나와 같은 부류인지 아닌지를 가른다.

그런 인식의 갈림길에서 다른 모든 것이 생겨난다.

'우리네'일 때는 눈을 특히 크게 뜨고 얼굴을 더 열심히 바라봄으로써 상대를 한 개인으로 더 또렷이 기억한다.

하지만 타인일 때는 얼굴을 대충 보고 만다.

 

태어나서부터 계속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눠온 우리는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식의 틀을 구성한다.

모든 정보를 그 틀에 맞춰서 재단하고 틀을 통해서 바라본다.

뉴스의 내용보다는 헤드라인 만으로 모든 내용을 판단했다고 생각하며, 사람조차 겉모습과 조건으로 분류하고 나누어 판단한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 우리를 편견의 늪에 가두어버렸다.

혐오와 차별을 넘어서는 길은 깊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87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실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그의 말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 낼 뿐이다."

 

정치인의 개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증거로 내세우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내가 봤다. 내가 다 안다.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개소리가 있을까?

 

 

P.127

이렇게 텍스트가 기반이 되는 환경에는 지금 하는 말이 아이러니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 줄 때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신호들이 빠져 있다.

화자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려 주기 위해 사용하는 신호는 조롱하는 어조("오 이런 고맙기도 하겠군요. 당신에게 꽤나 도움이 되겠어요")처럼 노골적이거나, 말을 잠시 멈추고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미소를 억누르는 행위처럼 미묘하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톤, 높낮이뿐만 아니라 때로는 손짓 발짓까지 사용하여 얘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텍스트는 이런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텍스트는 그 표현의 한계로 인해 더 깊은 곳까지 사고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버거운 이유는 바로 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고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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