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이충익은 담노라는 노자 주석서를 집필하였고 도올 선생께서는 이 주석서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자학 외의 학문을 배척하는 조선의 학문적 기풍 속에서 이런 훌륭한 노자 주석서를 지금 이 시대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느낌과 동시에 행운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1장에 대한 초원 이충익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행위의 인연이며 행적의 위탁이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형체의 비유이며 사물의 호칭이다.
상도라고 하는 것은 이치가 행적의 앞에 있고,
상명이라 하는 것은 뜻이 형물 속에 감추어져 있다.
상도란 지극하고 지고한 것으로 일상적인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상명이란 스스로 그러함(자연)에서 나오기 때문에
만약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적에서 가차된 것이기 때문에
가명지명과 다를 바 없다.
왕래가 무긍하고 성인이나 어리석은 자가 여기에서 말미암으며 폐할 수 없는 것이 상도라 한다.
천지가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무라고 한다.
만물이 기생하면 그것을 명해서 유라고 한다.
무는 유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고
유는 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무는 상무일 수 밖에 없으며 가명지무가 아니다.
그 묘함이 헤아릴 수 없다.
유는 상유이다. 가명지유가 아니다.
그 경계가 끝이없다.
헤아릴 수 없는 무와 끝이 없는 경계를 볼 수 있다면
유와 무가 상유와 상무임을 가유와 가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는 특별한 무이기 때문에 유와 다르지 않다.
유도 특별한 유이기 때문에 무와 다르지 않다.
두 가지는 이름이 다르지만 모두 늘 그러함으로 동일하게 자연에서 나왔으니
그것을 일컬어 현묘하다고 한다.
상유이기 때문에 유이자 무이고,
상무이기 때문에 유이자 무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하다한다.
거슬러가면 하나의 진에 도달하고
따라 내려오면 온갖 변화가 심연하니
이것이 중묘의 문으로 천 길 만길이 이것을 말미암아 가는 것이다.
이충익은 무를 도에 유를 명에 비유하여 해석을 하고 있다.
이원론적인 해석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유와 무가 같다는 말을 해석하는데 힘든 것이 사실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인 지금 아는 것이 유이고 모르는 것이 무라고 비유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알든 모르든 자연은 늘 그러해왔다.
자연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그저 자신의 티끌만 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시야를 벗어나야 도의 가장자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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