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인간은 어떻게 걸어왔는가?
이 책의 저자인 벤 윌슨은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인간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체로서 도시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다.
최초의 도시 우르크에서 시작하여 나이지리아의 라고스까지 이어지는 도시 이야기는 인간에게 도시가 어떠한 존재였으며, 어떻게 진화해왔고 어떤 미래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P.53
범죄, 질병, 죽음, 우울감, 신체적 노화, 빈곤, 인구과밀 따위를 감안할 때 도시는 괴로운 곳이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곳인 셈이다.
도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시에 산다는 것은 자유를 대가로 기회와 편리를 얻는 등가교환인지도 모른다.
P.65
우루크는 각자의 부와 기능과 권력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 계층 사회가 되었다.
이는 인류사에서 엿볼 수 있는 도시화의 어두운 면이다.
서로 합의한 공동의 과업으로 출발했을 법한 것이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매우 불평등한 사회로 변질되었다.
계급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지도 모른다.
완젼평등한 세상이란 허울뿐인 이상향인 것이 아닐까?
특히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도시 안에서는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최고층과 최하층의 격차는 그 옛날에도 극심했던 것이다.
P.73
우루크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은 우리에게 소리 높여 말한다.
한때 막강했으나 기후변화와 경제난으로 황폐화된 그 도시들은 오늘날 모든 도시들의 궁극적인 숙명을 끈질기게 일깨우고 있다.
그 도시들의 유구한 역사는 눈부신 발견, 인간의 업적, 권력욕, 복잡한 사회의 복원력 등에 관한 역사다.
그 도시들은 다가올 모든 것의 서막이었다.
초승달 지대의 많은 도시들은 수천 년간 지속되다 기후변화로 인해 결국 지금은 잊힌 도시들이 되었다.
기후변화는 지금 우리시대 가장 큰 이슈이기도 하다.
십 년 백 년 단위의 변화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천녀의 변화는 이미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가로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P.106
환각을 일으키는 듯하고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종말과 죄악과 구원을 얘기하는 요한계시록은, 바빌론을 기독교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문화 속에 영원히 못 박아버렸다.
바빌론의 적과 희생자들이 바빌론을 표현한 방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주요 도시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서구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독교적인 관점 역시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독선적인 일신론은 자신 외의 모든 문명과 문화를 멸시하고 탄압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빌론이다.
죄악의 도시로 좌표가 찍힌 바빌론은 우리를 기독교 세계관 안에 가두고 우리의 시야를 지배하는 독선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이것은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인간이 얼마나 약하면서도 악랄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P.118
분명히 우리는 도시에 훌륭한 하수도 시설이 있기를 바라고, 매춘부들의 수가 줄어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위생 처리된 도시는 전기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 도시다.
한 도시의 모순과 대립적 요소와 상스러움은 그 도시에 강렬한 자극과 맥동하는 에너지를 선사한다.
도시에는 위생처리가 필요한 만큼 오물도 필요하다.
도덕적 기준이 낮은 곳, 저열한 퇴폐업소가 있는 곳, 매력과 재력을 갖춘 곳, 이것은 대도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대도시의 상반되고 불온한 성격이다.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동경하면서 그곳에 다다르기를 원한다.
그 원동력은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자와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는 자
보수와 진보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인간의 길을 만들어왔다.
P.121
도시의 역동성은 주로 관념과 상품, 사람의 지속적 유입에 따른 결과다.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도시가 번영을 누리려면 언제나 그곳의 관문을 두드리는 대규모의 이주자들이 있어야 했다.
거대한 제국은 늘 다문화에 관용적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이다.
살기 좋은 국가에 인간이 몰리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만약 그렇게 다가온 이들을 배척하는 국가라면 살기 좋은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대 제국을 이룬 국가는 필연적으로 다문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배척과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제국은 균열의 씨앗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P.163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로마인들은 모두 목욕탕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로마의 장엄함과 관대함을 맛볼 수 있었다.
도시 문명의 모든 세련된 요소가 바로 목욕탕의 대리석과 모자이크 사이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책 속에서 로마를 논하는데 주요 소재로 사용된 것은 목욕탕이다.
목욕문화도 중요했겠지만,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도시가 주는 안락과 쾌락이다.
인간이 도시로 모여든 것은 바로 이것을 얻기 위해서이다.
문화의 힘, 로마인이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익들, 로마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바탕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P.208
중세는 유럽에게 암흑시대였지만,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게는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럽 외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P.223
도시의 본질인 시장은 늘 가능성과 위험으로 살아 움직인다.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서로 낯선 사람들끼리 만난다.
조심성이 필요하다.
다들 물건을 사거나 팔려고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기 집에 머무르면, 시장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타인들의 실존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자신의 실존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홀로 떨어진 인간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무엇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일까?
인간은 관계로 자아를 형성한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가 합쳐져 이루어진다.
모든 관계가 모인 특이점이 개인의 자아이고 이것이 개인의 자아가 우주적이기도 개인적이기도 한 이유이다.
P.226
알 콰리즈미가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오아시스 도시 출신이었다고 말하면 마치 그가 궁벽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바그다드라는 큰 도시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로마나 그리스, 아라비아의 도시들에 초점을 맞춘 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너무나 오랫동안 배제되고 무시되었지만, 중앙아시아에는 가장 세련된 도시 문화 중 하나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도시들 몇 개가 있었다.
P.234
스리비자야 제국은 13세기에 지구 상에서 사라졌고, 팔렘방의 항구는 철저히 약탈된 뒤 퇴적물 밑에 묻혀버렸다.
전성기의 팔렘방은 막대한 부의 집산지 겸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지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서기 11세기의 팔렘방보다 기원전 4천년기의 우루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실제로, 중세 인도양의 도시 세계는 대체로 팔렘방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 세계는 늘 변화하고, 자유롭게 떠돌며, 밖을 바라보는 문명, 자취를 거의 남기지 않는 문명이었다.
역사는 그 시대의 모든 존재들이 만들어가지만, 후세에 역사적 판단은 중요인물과 사건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많은 문명이 모두 자신의 역사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역사는 수많은 역사의 갈래 중 한줄기뿐일 것이다.
P.254
'Burspraken'은 '시민의 발언'이라는 뜻은 라틴어 단어인 'civiloquium'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Burspraken'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중세 저지 독일어와 소작농 사회에서 기원한 이 단어는 가장 낮은 신분의 주민들과 나누는 대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의미한다.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과 소통이 그 사회의 베이스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차별적이 성향을 완화시킬 수 있다.
소통이 안되는데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
공감이 없다면 차별의 벽은 높아질 뿐이다.
P.319
암스테르담은 새로운 유형의 도시, 금융 자본주의뿐 아니라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에 근거한 도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인구가 많은 도시들에는 늘 시장이 생겼지만,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가 번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다수의 시민들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며 사치품과 예술품을 소비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 미래의 도시는 대중문화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대중문화에 배출구를 제공하는 도시, 사람들을 위로하고 교화하는 도시였다.
그들의 새로운 도시 대중, 즉 세련되고 세상 물정에 밝고 유식하면서 견문이 높고 여가활동과 참신한 즐거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고 있었고, 암스테르담은 소비사회의 요구에 응한 최초의 도시였다.
훗날 암스테르담의 후계 도시인 런던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최초의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이 생긴 암스테르담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시발점일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는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냈지만, 그 반작용으로 개인의 고립과 부의 양극화도 만들어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을까?
P.415
파리의 활기를 불어넣고 파리를 '플라뇌르와 바도와 도락자(취미에 열중하는 사람)'의 도시로 만든 구불구불한 거리가 냉혹한 기하학적 배치와 대로에 밀려나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달리 말해, 엄격하게 관리되는 대로의 풍경은 플라뇌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선을 고정하는 대상이었다.
파리의 시가도를 전제적 통제의 징후로, 대중을 길들이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도시형 막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확하게 사각형으로 구획 정리된 도시의 모습을 우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길은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러울 뿐일까?
극단의 질서는 전체주의의 전조일 수 있다.
편하고 빠른 것 같지만, 우리는 길들여지고 누군가의 의도에 이끌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
P.429
백화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소비자들이 기존의 전문 상점 대신에 온갖 상품을 취급하는 백화점을 이용함에 따라 생산 과정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여겼다.
즉, 소비자는 판매대 너머의 판매자와 흥정 없이 정찰가로 거래하게 되었다.
아울러 여가가 상업화되자 이제 사람들은 근접성과 원격성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며, 초연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구경거리의 도시'를 관찰하게 되었다.
시장에서 백화점, 대형마트로 변해가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대형마트도 정점을 지나고 이제는 온라인 쇼핑, 배달대행, 편의점이 떠오르고 있다.
굳이 돌아다닐 필요조차도 없도록 집 앞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비즈니스 업체들은 고객은 왕이다라는 모토 아래 생산자들을 착취하고 있고, 동네 편의점은 상품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그 영역을 구축한다.
도시는 또 변화했고 인간은 그에 맞춰 적응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중요한 시대이지만, 개인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시대, 다음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까?
P.526
얀 흐미엘레프스키 같은 몇몇 도시계획가들과 건축가들에게 파괴된 바르샤바의 모습은 지독한 충격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계기로 다가왔다.
오래된 대도시의 비합리적 혼돈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급진적이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누군가는 파괴 속에서 기회를 본다.
기회란 혼돈 속에서 찾기 마련이다.
기회를 어떻게 쓸지는 찾은 자의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P.645
난잡함은 발전하는 도시의 역동적 특성이다.
난잡함을 규제하고 공식화의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는 창의성의 숨통을 조일 우려가 있다.
저자는 도시를 생명체로써 바라본다.
도시는 살아 움직이고 있고 변화하며 스스로 영향을 주기도 받기도 한다.
가이아 이론에서 지구를 생명계로 보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도시는 수많은 자원을 빨아들이고 오물을 내뱉는다.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다만 생태계에서는 누군가의 배출이 누군가의 양분으로 바뀌지만, 인간의 도시는 점점 그런 위치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지금의 시대정신은 어떨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스스로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이들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희망을 갖는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이다.
같은 모습의 안정된 직장과 수입을 원하고, 같은 모양의 집에서 살면서 같은 패턴의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꿈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도시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는 우리가 만든 자화상이다.
이 책은 도시의 미래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특히 도시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도시에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게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에너지에 대한 이런 주장에 동의하긴 어렵지만, 녹색도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기후위기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고, 갑론을박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게 인간의 탓이든 거대한 자연의 주기에 따른 것이든 말이다.
어떤 획기적인 전환이 없는 한 우리는 미래에도 도시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개인 하나하나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다르겠지만, 그 총합된 생각의 모습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를 둘러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는 우리의 꿈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 세대가 꿈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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